광란의 사랑과 증오 [책: 폭풍의 언덕_ 에밀리 브론테]

2024. 9. 7. 21:34책 읽고 끄적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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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단 하나의 소설로 문학사에 자신의 이름을 아로새긴 에밀리 브론테의 불멸의 걸작. 캐서린을 향한 히스클리프의 빗나간 사랑과 광기 어린 복수는, 그러나 그 비극의 이면으로 찾아올 무한한 평화의 순간을 귀중하게 감추고 있다. 행간을 박차고 나와 날카로운 음색으로 귓속을 긁어대는 인물들의 아우성을 인내심 있게 듣다보면, 1801년 ‘워더링 하이츠’의 문을 여는 에밀리 브론테와 비로소 마주할 수 있다. 출간 당시 비도덕적이고 야만적이라는 이유로 비판받았던 작품은 반세기가 지나 서머싯 몸, 버지니아 울프 등의 극찬을 받으며 작품의 가치를 인정받았고, 현재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세계적인 명작으로 자리 잡았다. 국내 처음으로 에밀리의 언니이자 《제인 에어》의 작가이며 1850년판 《폭풍의 언덕》의 편집자이기도 한 샬럿 브론테의 ‘서문’을 실었다.
저자
에밀리 브론테
출판
휴머니스트
출판일
2022.10.31

 

 

 

 한 번 시작하면 금방금방 읽었던 것 같다. 하지만 자주 읽게 되지는 않아서 완독까지는 오래 걸렸다. 장르가 문제였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로맨스 장르를 좋아하는 편이긴 한데 이렇게 난해하고 격정적인 감정만 표현되어 있으면 조금 몰입감이 떨어지는 듯하다. 다소 날것의 감정을 드러내며 사건이 진행된다고 느꼈다.

인상 깊었던 문구는 아무래도 마지막 히스클리프가 자신의 행동을 성찰하는 부분이었다.

 

“참 초라한 마지막이야. 그렇게 노력을 했는데 그 결과가 겨우 이 정도였나? 두 집을 부수려고 헤라클레스처럼 준비했지. 막상 준비가 다 끝나고 나니 기왓장 하나 들추고 싶지 않아 졌어. 난 파멸을 즐길만한 힘도 없어졌고 쓸데없이 남을 파멸시킬 생각도 없어졌단 말이야.”

 

나는 이걸 성찰로 해석했다. 결국 자신이 했던 잔인한 행동들이 다 부질없고 복수는 그가 진정으로 바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히스클리프는 복수를 위해 부자 신사가 되어 다시 캐시 앞에 나타나지만 결국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이는 그가 정말 원했던 바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저 서로 사랑했음에도 자신을 버리고 에드거 린턴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복수를 결심하게 되는데, 이도 서로의 오해로 발생한 실체 없는 분노라고 생각한다. 캐시 또한 히스클리프를 사랑했기 때문에 에드거와 결혼한 것이기에 이것을 알고 서로의 오해가 쌓이지 않았다면 이런 파국의 결말을 맺게 되지 않았을 것 같다.

이 소설의 제목인 폭풍의 언덕을 영어 원어가 워더링하츠라는 것을 마지막에 다시 제목을 보면서 알게 되었다. 워더링하츠는 언쇼가의 저택 이름이다. 언쇼 가에 사는 사람들은 정말 모두 폭풍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의미인 워더링(wuthering)은 바람이 거세다는 뜻의 방언이라고 한다. 또한 하이츠(heights)라는 뜻은 보통 밑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지어진 집이라는 뜻을 가진다고 한다. 지난 학기 교양수업에서 집의 위치와 보이는 풍경에 따라 부나 계급의 차이를 알 수 있다는 내용을 배운 적 있다. 이처럼 언쇼 가는 소설에서 상당한 재력가의 높은 계급의 사람들로 나온다. 또한 이러한 계급으로 인해 소설 속 주인공들의 사랑에 장애기 발생하기도 한다. 극 중 히스클리프라는 청년은 출신을 알 수 없는 고아 출신이지만 언쇼 가의 주인의 보살핌으로 워더링하츠에서 살게 된다. 그러다 그 집안의 막내딸인 캐서린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서로 갖고 있는 계급의 차이로 만남에 장벽이 생긴다. 또한 이러한 계급의 문제로 비슷한 계급의 린튼가의 남자와 결혼한다. 이처럼 나는 이 소설의 제목이 내용의 성격을 정말 잘 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잔인하고 파괴적인 행동과 태도는 타인에게는 물론 스스로에게 가장 해로운 것이라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히스클리프의 사랑에 대한 슬픔으로 복수를 결심하고 실행하는 모습이 정말 피로하고 어두웠다. 이것을 보면서 처음에는 작중 다른 인물들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결국 소설의 마지막에 되어서는 늙어서 죽음을 기다리는 히스클리프의 모습을 보고 그가 복수로 가장 불쌍해진 인물이지 않나 싶었다.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사고는 나를 갉아먹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운 인생을 남에게 보여주기 식으로 산 것 같아서 안타깝기도 했다. 낭비적인 시간 같았다. 물론 소설이기에 낭비라고 말하기는 조금 의미가 다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정말 스스로에게 낭비적인 인생을 사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내 아까운 인생을 자신을 슬프게 한 사람들에게 사용하지 않았으면 히스클리프는 훨씬 행복한 인생을 살았을 것 같다.

또한 이런 열정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어떤 존경심 같은 것이 들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에너지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정말 쉽게 무기력해하고 의지력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히스클리프처럼 사랑 때문에 복수를 결심하고 이를 실행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가상의 인물이지만 복수가 아니었어도 성공했을만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했다. 내 기준에서는 엄청난 실천력과 의지력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사랑해서 한 가문을 몰락하게 만드는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드물고 어려운 일이다. 사랑이라는 감정 하나로는 힘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는 참 흥미진진하게 이 소설을 읽은 것 같다.

 

에밀리 브론테라는 작가가 살았던 시대상에서 어떻게 이런 소재의 소설이 나왔는지는 조금 신기하면서 의문이었다. 그녀가 살던 시대는 일단 여성에게서 상당히 엄격한 시대이다. 또한 이렇게 격렬하고 감정적인 사랑을 경험해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어떤 소설적 상상력과 작가적 관찰력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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